필자의 만화 중 완성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애기와 순호 만화는 여러 곳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어쩌면 저 만화가 높은 수준을 이룬 이유가
여러 곳에서 베끼고 표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러하니.
그렇기에 언젠가 표절과 모티브의 경계에 대해 다루겠지만, 현재의 주제는 어떻게 만화를 구성하느냐에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연구라기보다는 어떻게 만화가 만들어졌나에 대해 설명하는 글에 가까우나, 만화 구성에 대한 이론도 포함되므로 이 곳에 올린다.
독자가 2차 창작에 관심이 없다는 가정 하에 인물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주인공 순호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이다. 그 외에 여러 자잘한 설정들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인물 성격의 핵심은 남편이 자식을 죽인 것에 있다.
필자는 순호라는 캐릭터가 지닌 여러 속성 중 이러한 비극성에 이끌려 이를 주제로 만화를 그리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작가의 흥미와 독자의 흥미가 일치해야만 독자가 만화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작품 자체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독자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작품을 읽지도 않고 뒤로가기를 누르거나 스크롤을 내리기 마련이다.
작가는 자녀 상실의 비극은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만화를 그리기로 결정했다.
<출처 - "민주주의를 위해 포기하세요" - 최정현>
<자식을 잃은 개구리를 통해 환경오염을 비판한다>
1990년대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발간된 환경 잡지 "까치"에서 필자는 해당 삽화를 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껌을 밟아서 발이 잘려나가는 어린이 삽화를 포함해 수위가 제법 높았다.
아무튼, 이 삽화에 대해 각주가 달려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자식을 잃게 한 공장과 슬픔, 이 모든 한에 개구리는 통곡할 수도 있었건만
무덤덤하게 공장을 바라보는 부모의 텅 빈 표정을 통해 그 처절한 체념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하는 식의 내용이었다.
지금 기준에서는 명백히 어린이에게 할 법한 소리는 아니지만
작가가 인물의 비극을 표현한 방법,
극에 달한 감정은 겉보기에 체념과도 같다는 방식이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
만화의 내용 구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유명 유튜버 Tomska의 Where's The Baby?>
<만화의 핵심 모티브 중 하나이다>
위 영상의 10초 부근까지 보면 세세한 차이가 있겠지만 최상단 만화 내용의 판박이다.
여러 변명을 댈 수 있겠지만 솔직히 표절이라고 하면 할 말 없다.
유일한 버팀목은 각각이 초점을 두는 곳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각 장면에서 보이는 태도에서 확실히 할 수 있는데,
각 부모의 행동만 놓고 보았을 때, 영상의 아버지는 말만 웃기게 할 뿐 자식의 부재에 대해 당혹감, 슬픔을 분명히 보이고 있으며
만화의 어머니는 자식이 없음을 인지했음에 불구하고 미소지으며 타인을 자식으로 대하는 등 현실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Tomska의 영상에서 핵심 소재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귀여운 목소리를 내는 모순을 통한 해학성인 반면
만화의 핵심 소재는 아기의 부재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극성이다.
필자가 만화 내용을 주인공이 "우리 아가 어딨쪄여?" 하고 나머지 인물들도 "모르겟쪄여! 주겄쩌여!" 하는 식으로
영상의 핵심 소재를 모방했다면 이는 빼도 박도 못하는 표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는 영상에서 '애기 어르기->알고 보니 애기 상실' 이라는 상황만 소재로 활용했다.
이러한 부분에서 만화는 단순한 표절에서 모티브를 통한 재창작이라고 볼 여지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내리는 건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고, 독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건 농담을 표절(혹은 변용)한 거라 생각한다.
모티브와 표절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계속 하기로 하고, 만화 구성으로 돌아가자.
현재까지 필자가 확립한 것은 작품 주제(자녀 상실의 비극)와 내용(Tomska 영상의 초반 10초)이다.
이를 이용해 만화의 내용을 구성하면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의 아기 어르기> -> <아기가 없음을 드러내기>
만화를 그리기로 결정했을 때, 이는 영상에서도 5초 내에 끝낼 정도의 단발성 소재였기에 1페이지 내외로 짧게 끝낼 필요가 있었다.
일본-한국에서 내용을 최소한으로 줄였을 때 보통 4 컷 단위의 호흡을 선보인다.
<최초 내용 구성>
<마지막 컷을 통해 3컷의 반전이 해명되어버린다>
그러나 4컷 만화는 구조 내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나뉘기에 소재의 전달이 지연된다.
기승전결을 풀어서 쓰면 <상황 설정>-<관심 집중>-<흥미 절정>-<상황 정리>인데
독자는 주어진 내용을 전부 읽고 나서야 머릿속에서 이해한다.
절정에 해당하는 3컷에서 드러나는 반전은 다음 컷을 통해 해명되고 전달되기에 그 충격이 덜해진다.
반전을 강화하고자 하면 기승전결 구조를 변칙적으로 이용해서 4컷에 <절정>을 배치할 수 있다.
이 경우 기승전결을 기대한 독자에게 결 부분이 없이 미완성된 내용이 던져져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한 편,
독자는 마지막에 주어진 반전을 깨닫게 되며 결론 부분이 머릿속에서 완성, 이를 통해 반전이 더 강화된다.
<1차 수정>
<첫째 컷을 무시해도 내용 전개에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 경우도 문제가 있는데 무리하게 절정 부분을 마지막에 배치하려다 보니
기-승에 해당하는 앞 부분이 늘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반부 내용 전개가 지루해지고, 결과적으로 독자의 흥미도가 떨어진다.
더군다나 필자는 내용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첫째 컷과 같은 낭비는 피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아예 첫째 컷을 지워버려서 서구 만화에서 자주 쓰이는 3컷 만화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너프나우>
<한국에서 팬 번역되는 웹코믹이다.>
<상도 여럿 받았고, 왠만한 작가들보다 만화를 잘 그릴 줄 안다>
서구 만화에서 쓰이는 3컷 만화 방식은 4컷 만화의 기승전결 구조에서 한 컷이 줄었기에 더 빠른 호흡을 가진다.
보통은 기-승-결 구조를 띄게 되며, 절정은 승 혹은 결에 포함된다.
3컷으로 내용을 끝내고, 절정을 마지막 컷에 옮기기에 무리가 없기에
필자는 3컷 만화 방식을, 기승전결로 따지자면 절정이 마지막 컷에 포함된 구조를 선택하게 되었다.
<최종 수정본>
<이런 골자를 바탕으로 만화가 그려진다>
작품의 주제와 내용 구성까지 전부 끝마쳤다.
그 과정에서 만화의 러프 스케치까지 완성되었다.
여기서 마무리지을 수 있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
첫 컷을 단조롭게 하지 않고, 위 그림으로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경우 역시 따로 글을 파서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지만 결론만 쓰자면
역동적인 구도는 정말 필요할 때에만 써야 효과가 있다.
당장 보기에 1컷을 위 그림으로 하면 구도의 단조로움을 피해서 좋겠지만
이런 역동적인 구도를 남용할 시 정말 중요한 장면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전달하기 힘들어진다.
공포 영화로 비유하자면, 점프 스케어를 남용하면 영화의 질이 떨어지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또한, 1컷과 2컷의 구도가 동일하고 3컷만 다름을 통해 3컷의 내용-반전을 강조하는 효과를 지니게 된다.
전체 만화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마지막 컷에 하이앵글을 둔 역동적인 구도를 선보임으로서 절정 혹은 주제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만일 모든 컷이 역동적이었다면 저 마지막 컷이 더 중요하다는 느낌이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첫째 컷은 단조롭게 가기로 결정되었다.
여기까지가 해당 만화의 첫번째 부분이 구성된 방식이다.
실제로는 모든 과정이 머릿속에, 최종 수정본이 사실은 최초로 그린 내용이지만 실제로 이런 과정을 거쳤음을 적는다.
이 글을 통해 한 편의 만화가, 비록 길이가 짧을 지라도, 제작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요소가 고려되는 지 알리는 한 편,
필자 역시 만화 구성에 있어서의 이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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