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노력, 승리의 3공식을 세운 근육맨.-
-우스꽝스런 개그물의 첫인상은 이후 배틀물로 환골탈태하며 점프 공식의 초석을 다진다.-
만화가 대박을 쳤다면 인기가 떨어지기 전까지 어떻게든 연재를 계속 해야만 합니다. 원래 기획했던 연재분을 넘어서도, 더 이상 참신한 발상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전개,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내 독자들의 지갑을 끝까지 털어야 합니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전개는 끝나기 마련이고 궁지에 몰린 작가와 편집자는 진행중인 에피소드 질질 끌기, 생략해도 되는 동료들의 모습을 구태여 묘사하기, 충격적인 떡밥을 던져놓고선 다음 화에서 바로 전혀 아니라고 시치미떼며 무효화하기 와 같은 시간끌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짓거리를 해도 결국은 "내가 해먹을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하고서는 소재가 바닥을 칩니다. 이때 작품은 중대한 고비를 마주하는데, 마치 30년을 살고서 죽을 때가 되면 깃털을 뽑아내고 30년을 더 산다는 독수리의 일화처럼, 장르전환이라는 환골탈태를 하느냐 아니면 실패하고 비틀비틀 연재하다 그냥 허무한 결말을 내고서는 완결을 찍싸느냐 입니다. 물론 독수리의 일화는 헛소문이고 실제로 독수리는 저런 미친 짓을 안 하지만 비유입니다.
장르 전환은 많은 장편만화에서 이루어지거나 이루려고 시도합니다. 이걸 하면 짱 좋은게 다른 장르로 바뀌면서 새로운 소재, 새로운 전개가 물 밀려오듯 들어옵니다. 그래서 색다른 재미를 불어넣어서 작품을 더 오래 연재할 수 있게 만들고, 이게 원래 장르를 위한 거대한 시간끌기로도 작용해서 바뀐 장르가 조금 재미없어졌다 싶으면 원래 장르로 회귀해서 초창기 팬들이 계속 작품을 붙잡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슬램덩크'는 농구만화의 성전이지만 이런 슬램덩크도 중간에 정대만 써서 학원폭력물을 찍습니다. 농구랑 전혀 상관없는 줘팸질을 보면 그냥 싸움구경 좋아하는 사람들 끌어모으기 좋고, 원래 독자들이 지겨워져서 떠나기 전에 "안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라고 하면서 다시 농구만화로 돌아가서 이탈하는 걸 방지합니다.
-슬램덩크 정대만 농구부 습격 에피소드 중. 너희들 왜 싸우니?-
또 다른 예로는 기본적인 틀은 순정만화로 연재하다 필요할 때 갑자기 싸움질을 해서 시간을 끄는 '투러브 트러블'이나 '로젠 메이든'같은 작품들이 있겠습니다. 아니면 '내가 인기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가 내성적인 오타쿠를 모에화한 자학개그물로 나아가다 중반부에 소프트 GL 백합물로 방향을 전환한 것도 좋은 장르전환의 예시입니다. 개그만화들이 잘 나가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시리어스 진지물이 되는 것도 장르 전환의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건 이것 자체만으로 주제 새로 파서 써야 하니 이번에는 안 다룹니다.
-드래곤볼 마지막 화.-
-1화를 보고 아무도 손오공이 사이어인 왕자 베지터와 포타라로 합체한 뒤 마인 부우와 싸우는 전개를 예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르 전환을 할 때는 보통은 액션 배틀만화가 전환대상인데, 그 이유는 '근육맨'이라는 초창기 대작이 개그물->배틀물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한 이래 장르를 불문하고 뭐든 배틀물로 전환할 수 있는, 그리고 배틀물 자체를 오래 연재할 수 있는 경험과 노하우를 쌓았기 때문입니다. '드래곤볼' 역시 유쾌한 모험활극에서 시작한 작품이지만 인기가 너무 없어서 천하제일 무술대회를 기점으로 액션배틀물로 전환하니 사람들이 많이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이런 배틀물 공식들을 풍자해서 뜬 '무적콧털 보보보'같은 작품도 나옵니다. 또한 배틀물 자체가 사람들이 불장난 다음으로 재미있게 본다는 사람 싸움이니까 왠만한 만화잡지의 목표시장인 남성 독자들을 연령불문하고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수 많은 일본만화들을 보면 처음에는 다양한 재미를 보여주던 것이 가면 갈수록 싸움질밖에 보여주지 않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합니다.
-가정교사 히트맨 REBORN은 개그물로 시작하였으나-
-배틀물로 전환하면서 개그는 증발하였다.-
하지만 장르 전환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닌데, 단점으로는 기존 독자들이 다 떨어져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나사 풀린 마피아들이랑 개그 시트콤을 찍는 걸 기대하던 사람들은 '가정교사 히트맨 REBORN'이 갑자기 봉골레 선발이라든가 미래로 날아가서 전쟁하든가 하는 거 보면 흥미가 팍 식어서 손절하고, 괴수를 잡는 거랑 요리하는 거의 밸런스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토리코'가 먹방을 버리면서 똑같이 작가한테 버려진 기분을 느낍니다.
-[Tandoori] 솔개의 선택? 메기효과? 가짜 우화는 현대판 주술이다. -
-https://voidstrider.blogspot.com/2016/03/blog-post.html-
또한 장르 전환이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실패하면 인기만 떨어지고 그대로 원래 장르로 억지로 돌아와야 합니다. '드래곤볼' 셀전 이후 손오반의 좌충우돌 하이틴 학원물은 분위기가 식으니까 급히 마인부우편으로 넘어가고, '러브히나'는 중간에 액션물 찍겠다고 신부탈환전을 하는데 순정만화라는 장르에서 시간끌기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 긴 전투를 집어넣는 안 좋은 전통은 이후 '스쿨럼블'이나 '하야테처럼', '니세코이'에까지 전해집니다. 러브히나 작가는 제 버릇 못 고치고 마법소년 네기마에서는 잘 가던 순정만화를 중반부부터 배틀물로 전환하더니, 'UQ HOLDER'에서는 아예 배틀물에서 순정만화 시츄에이션을 진지한 설정으로 집어넣는 악수를 벌이는데, 이처럼 장르 전환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면 작품의 평가가 계속 깎여나갑니다.
-UQ HOLDER. 너희들 왜 연애질 하니?-
그러나 그렇게 기존 독자들이 떨어져 나간다고 하더라도 신규 독자들의 유입이 어마어마하니까 작가와 편집자들은 계속 똑같은 수를, 이게 실수인지 명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복합니다. 이게 나쁘다고만 일갈하기는 힘듭니다. 우리는 장르 전환을 통해 명작이 된 '드래곤볼' 천하제일 무도회 이후, '유유백서' 겐카이의 제자 시험 이후, '은혼' 시리어스편, '마인탐정 네우로', '샤먼킹'과 같은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또한 장르전환은 이처럼 대놓고 이루어지지 않고 소소하게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 멸망한 세계에서 무쌍을 찍는 만화에서 북두신권의 패자 라오우와 이에 대항하는 남두육성권+켄시로의 시대극 요소가 더해진 북두의권 1부,
- 초창기에는 서로 다른 격투술의 격돌에 주력했지만 3부, 4부로 넘어가면서 보스몹 한 명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선회한 바키 시리즈,
- 핵심은 스탠드 배틀물이지만 배경을 일본 마을, 이탈리아 마피아, 교도소, 미국 전역을 마음대로 전환해대는 죠죠 시리즈
- 핵심은 육체적인 배틀과 정신적인 수싸움이지만 넨이라는 설정으로 능력자물 요소가 첨가된 헌터X헌터
처럼 핵심 세일즈 포인트는 남겨두되 그 외 배경이나 상황, 설정을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독자들은 장르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채기도 힘든데, 이는 살짝 딴 이야기를 풀기만 해도 1급수에 사는 도롱뇽마냥 "아 작가가 초심을 잃었네" 하고 픽 죽어버리는 독자 성향상 매우 효과적인 비책입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변화는 자기 작품이 무엇을 주력으로 내세우는지를 혼동하지 않아야만 제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셀전 이후 '드래곤볼'이 전투가 최우선이어야 했는데 이를 혼동해버리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손오반과 비델의 러브코메디를 중심으로 그려내려다가 결국 또다시 천하제일 무술대회 처방을 받고 맙니다.
장르전환은 이처럼 양날의 검처럼 작품의 수명을 늘려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독자들이 작품에서 하차하게 만들기도 하는 리스크가 높은 수단입니다. 허나 드믈지만 베르세르크 혹은 나루토와 같이 연재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장르만을 충실히 보여주는 장편만화도 있으며, 어떤 작가도 작품을 구상할 때 장르전환을 고려할 수는 있어도 필수요소로 상정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독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싸움질로 바꾸자, 여자들 잔뜩 등장시켜서 서로 사귀게 만들자 같은 접근법으로는 장르전환이 오히려 역효과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장르전환을 한다면 작가와 편집부는 왜 장르를 바꾸는지, 작품의 핵심 세일즈 포인트가 얼마나 변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장르가 변경되기 전과 후 작품이 무엇을 가장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지를 확실히 알아야만 하며, 오직 이런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에서만 장르전환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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